Ⅲ. 10대 사례를 통해 본 반 성폭력 담론의 발전
1. 부천서 성고문 사건
2. 변월수 사건
3. 강정순 사건
4. 김부남 사건
5. 김보은, 김진관 사건
6. 성폭력특별법 제정
7.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8. 롯데호텔 성희롱 사건
9. 강릉 K양 사건
10. 사단장 성추행 사건
Ⅳ. 남은 문제들
1. 성문화의 사회구조적 변화
2. 법.제도적인 보호 장치 마련
3. 성폭력 예방과 성교육 실시
4. 피해자에 대한 보호책
5. 가해자 재범 방지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
<참고문헌>
우리사회에서 성폭력 문제를 인권 침해의 문제로 또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해결하기 시작한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성폭력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부천경찰서 권인숙 성고문 사건, 변월수 사건 등 일련의 사건들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면서이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이 알려지고, 1990년 초부터 성폭력을 전문으로 상담하는 상담소가 등장하면서 은폐되어 있던 성폭력 문제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성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던 성폭력 상담소와 여성단체, 시민단체는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도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성폭력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94년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성폭력 특별법의 제정은 성폭력이 사회적인 범죄임을 알렸을 뿐만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
1993년에는 국내 최초의 성희롱 소송사건인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이 사회문제화 되었다. 이 사건은 1998년 대법원 판결에서 신교수가 행한 성희롱의 위법성이 인정되었고 성적 표현 행위의 위법성에 피해자가 명백하게 거부했는지 여부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결과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성희롱도 인권침해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99년에 개정된 ‘남녀고용평등법’과 같은 해 신설된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에 직장내 성희롱 규제조항이 신설되어 직장내 성희롱을 법과 제도적으로 규제할 수 있게 되었다(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2001).
이러한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로 성폭력은 여성이 순결을 잃은 것이 아니라 폭력 피해를 입은 사회적인 범죄이며, 개인의 성문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침해한 인권의 문제로 인식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들은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의 부족, 법과 제도의 미비로 숨겨진 범죄의 피해자로 살아가고 있다. 성폭력 사건의 신고율은 강간과 강간미수 그리고 심한 추행의 경우 6.1%에 머물고 있어 여전히 많은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자신만의 숨겨진 비밀로 혹은 가족의 수치로 간직한 채 일생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최인섭․김성언, 1997).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반 성폭력의 역사는 성폭력을 사회적인 범죄로 또한 성희롱의 위법성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한 성과를 남겼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해결해야할 많은 성폭력 관련 문제들이 남아있다. 성폭력 추방을 위한 반 성폭력 담론과 운동의 역사를 정리해 보면서 앞으로 성폭력 문제를 풀기 위해 남은 숙제들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Ⅰ. 성폭력의 개념의 역사
우리 사회에서의 성폭력 개념을 정의하는 논의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하나는 넓은 의미의 여성에 대한 폭력(gender violence 혹은 violence against women)으로써의 성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좁은 의미의 여성에 대한 폭력(sexual violence)으로써의 성폭력이다. 이 두 범주에 관한 성폭력 개념 정의 논쟁은 1991년부터 시작된 성폭력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성폭력 특별법 제정추진 특별위원회’에서 성폭력 특별법 시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민경자, 1999).
넓은 의미의 성폭력 개념은 강간, 성추행을 포함한 성적인 폭력과 아내구타, 매매춘, 인신매매 등의 여성에 대한 폭력 그리고 심리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까지를 포함한다.
좁은 의미는 성적인(sexual) 폭력의 의미를 강조하고 개인의 성적인 자유와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로 보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에 근거하여 강간을 비롯한 성추행, 성희롱 등 신체적 피해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느끼는 불쾌감, 공포, 두려움까지를 말한다. 이 논의에서는 일반인들의 정서와 법 적용의 편리성을 고려하여 성적인 의미를 강조한 좁은 의미의 성폭력 개념이 받아들여졌다(변혜정, 1999).
현행법인 성폭력 특별법에서의 성폭력의 개념은 제정 당시에 ‘정조에 관한 죄’로 정의하여 성폭력 제정 이전과 마찬가지로 성폭력 피해를 피해자의 잘못으로 바라보게 하는 결과를 파생했다. 그리고 1997년 개정을 통해 ‘강간과 추행에 관한 죄’로 바꾸었으나 이는 개념 정의가 아니라 성폭력 유형의 범주를 명시한 정도이다. 또한 강간과 추행, 성풍속 범죄를 한데 엮은 성범죄의 틀을 고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폭력 특별법은 여전히 개념 규정, 친고죄 폐지 등 개정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성폭력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는 1990년대 중반부터 제기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문제로 성적인(sexual) 폭력의 의미를 강조하는 현재의 개념으로는 보다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에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입장이다. 현재 일반화되어 있는 성폭력의 개념이 법을 만들고 사회 문제화하는데 효율적이었지만 성폭력과 성차별로 인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성폭력의 유형인 강간, 성추행, 성희롱 등의 범위에 대해서도 법적인 영역, 여성학적 영역에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우선 법적인 영역에서는 성폭력의 개념을 협소하게 정의하는 경향이 있고 물리적인 강제만을 인정하지 심리적인 강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히 강간의 경우는 남성을 가해자로 여성을 피해자로 한정하여 성기 삽입 여부로 강간으로 결정한다. 그로 인해 현재 발생하고 있는 남성 피해에 대해서는 그 피해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성추행으로 분류하여 피해를 축소시키고 있다. 또한 여성학적인 영역에서는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서 강간 개념에 성기삽입 여부만이 아니라 남성 피해, 구강성교, 항문성교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강간 개념의 확대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장윤경 2002).
이렇듯 성폭력에 대한 개념 규정은 지금도 활발히 진행 중에 있으나 현재까지 진행된 논의에 의하면 성폭력이란 강간뿐만 아니라 성추행, 성희롱 등 성을 매개로 상대방의 동의 없이 가해지는 모든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폭력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성폭력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나 공포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행동제약도 간접적인 성폭력이라 할 수 있다.
Ⅱ. 성폭력 발생 실태의 변화
경찰청의 경찰백서에 의하면 <표1>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성폭력 범죄 발생은 연간 9천 건을 넘어섰다. 이 결과는 경찰에 신고된 것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 사회의 강간 신고율이 6.1%인 것을 고려한다면 드러나지 않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또한 성폭력 발생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대검찰청의 범죄분석에 의하면 보고 된 강간 건수는 1999년에 6412건, 2000년에 6986건, 2001년에 6919건이었다. 또한 범행시의 나이는 2000년에는 미성년자가 8.0%, 성인이 84.1%였고 2001년에는 미성년자 6.5%, 성인 87.2로 미성년자에 의한 강간범죄가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폭력을 전문으로 상담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91년 4월 13일 개소 이후 2002년 12월 31일까지 받은 상담은 27,269건이었다. 그리고 2002년에 접수된 상담은 총 3,538건으로 이는 2001년의 성폭력 피해상담 2,869건에 비해 2.9% 증가한 결과이다.
2002년도 상담을 분석해 본 결과 피해 유형은 성추행이 43.6%로 가장 많은 분포를 보였고, 강간이 34.9%, 성희롱 16.2%, 특수강간 3.0%순이다. 또한 피해자 성별분포는 여성이 97.3%, 남성이 2.7%로 나타났다. 피해자 연령별로는 성인인 경우가 55.5%, 청소년 19.3%, 어린이 15.7%, 유아 7.2%로 미성년 피해자의 심각성이 여전히 드러나고 있다.
가해자 성별은 남성이 98.8%, 여성이 0.9%, 남녀 0.1%로 나타났으며 가해자 연령은 성인 78.3%, 청소년 10.7%, 어린이 3.5%, 유아 0.9%로 가해자의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는 아는 사람이 77.2%, 모르는 사람이 19.2%로 대부분의 피해가 아는 사람에 의한 일어나고 있다. 아는 사람의 경우는 직장 상사나 동료가 가장 많은 분포를 보였고 친족, 학교나 학원, 동네사람, 데이트 상대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2002년도 상담 내용의 특징은 미성년 가해자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2년에 미성년 가해자에 의해 발생한 사건은 14.8%로 2001년 11.8%에 비해 증가했다. 특히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아니하는 14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가해자로 등장하고 있어 또래끼리의 성폭력 실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미성년자의 피해와 가해의 심각성이 드러나고 있는 현상이 최근의 발생 실태이다.
성폭력이 사회문제로 공론화되면서 많은 이들이 성폭력이 더 발생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성폭력 피해를 입고도 드러내어 해결하지 못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이 성폭력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범죄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자신의 인권을 보호받기 위한 변화였다. 이는 그동안 성폭력상담소 등에서 성폭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알려내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인식을 바꾼 결과이기도 하다.
Ⅲ. 10대 사례를 통해 본 반 성폭력 담론의 발전
1. 부천서 성고문 사건
1986년 6월 여대생 권인숙은 노동현장에 위장 취업하여 노동운동을 하던 중 부천경찰서에 체포되어 담당 문형사에게 성고문을 당했다. 권인숙은 감옥에서 변호사를 통해서 자신이 당한 성고문 사건을 언론과 여성단체에 알렸으며 문형사를 강제추행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하였다. 또한 권인숙의 변호인단은 사건 관련 경찰 6명을 독직, 폭행 및 가혹행위로 고발했다.
여성단체들은 ‘여성단체연합 성고문대책위’를 구성했으며, 여성단체․시민단체․종교단체 등이 연합한 ‘부천서 성고문사건 공동대책위’를 구성하여 운동을 펼쳐나갔다.
성고문 사건에 대한 분노는 전 국민들에게 퍼져나갔고, 거의 매일 성고문․용공조작․폭력정권 규탄대회가 열렸다. 변호사 166명이 변호인단으로 참석하여 공개재판을 요구하였고, 많은 여성들이 재판정으로 몰려드는 등 독재정권 하에서 보기 드문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피해자인 권인숙씨는 풀려나고, 사건발생 3년만인 1989년 대법원은 문형사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하였으며 권인숙씨에게 위자료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기 꺼려하던 사회 분위기에서 피해 여성의 용기있는 결단으로 성폭력의 실상을 폭로하고, 공론화 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또한 공권력에 의한 여성 인권 유린을 처음으로 폭로한 사건이다. 또한 여성문제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일반 대중 여성들의 폭넓은 지지와 공감을 얻었다는 의의도 있다.
2. 변월수 사건
1988년 9월 10일 변월수씨는 강간 위기상황에서 가해자의 혀를 잘라 자신을 방어했다. 변씨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 남성의 혀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되었고 과잉방어라는 이유로 징역1년을 구형 받았다. 여성운동단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법부는 “정당방위로서 인정될 수 없는 지나친 행위”라며 변씨에게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여성에 대한 사법부의 편견과 여성의 인권보다 남성의 혀를 더 중시하는 사법부의 성차별적인 태도를 여실히 드러냈다. 심지어 ‘피해자가 죄인으로 취급되는’ 성폭력 재판과정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2심에서는 무죄판결을 받아 여성의 자위권을 법적으로 인정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사건은 성폭력의 위기에 처한 여성이 취할 수 있는 ‘정당’한 자기 방어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3. 강정순 사건
1988년 12월 5일 대구시 대현동 파출소 내에서 경찰관 2명이 강정순씨를 윤간하였다. 가해자인 박순경과 김경장은 강씨를 모욕, 협박하고 윤간하여 성병까지 옮겼다. 경찰에서는 피해자인 강씨가 다방 여종업원이었다는 점을 부각시켰고 피해자인 강씨를 무고죄로 맞고소했다.
공정한 수사를 하여야 할 검찰은 가해자인 경찰을 도와 증거를 은폐, 조작하였으며 피해자인 강씨를 간통죄와 무고죄로 구속하였다. 여성단체들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성명서와 경찰, 검찰에 대한 규탄대회, 치안본부 항의방문, 가두홍보 등의 활동을 하였다.
강씨는 무죄로 풀려났으나 가해자인 경찰은 끝내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1992년 2월 19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은 ‘대구 강정순씨 윤간사건’ 무혐의 처리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통해 사법부의 인식의 한계와 공권력의 횡포를 규탄했다.
4. 김부남 사건
1991년 1월 어린이 성폭력 피해자 김부남씨가 21년 전 자신을 강간한 이웃집 아저씨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김씨는 9살 때 이웃집 아저씨에게 강간을 당했다. 김씨는 고소를 하려 했지만 당시 성폭력범죄는 친고죄로 고소기간은 6개월이었으므로 이미 공소시효도 훨씬 넘긴 이후였다. 김씨는 법적으로는 이미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되자, 스스로 가해자를 벌하기로 마음먹고 가해자를 살해한 후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여성단체는 ‘김부남 사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라고 함)를 구성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에 관한 사회적 인식전환의 필요성과 성폭력관련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활동도 함께 하였다.
이 사건은 어린이 성폭력의 후유증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로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라는 김씨의 절규는 당시 성폭력의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고, 성폭력은 몇몇 운 나쁜 여성의 문제라는 일반인들의 인식전환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이 사건은 다음해에 일어난 김보은, 김진관 사건과 함께 성폭력특별법을 제정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5. 김보은, 김진관 사건
1992년 1월 7일, 13년 동안 의붓딸을 성폭행 해 온 의붓아버지를 피해자 김보은의 남자친구인 김진관이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의붓딸인 보은이가 9살 때부터 상습적인 강간을 시작했다. 김보은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비로소 주중에나마 아버지와 떨어져 기숙사에 머물게 되었고, 학교 친구인 김진관에게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김진관은 고통스러워하는 보은이를 도우려는 마음에 그날 밤 보은이의 아버지를 찾아가 "이제 보은이를 놓아주라" 고 간청했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다 잡아넣겠다. 죽여버리겠다"고 당당하게 나오는 데에 격분하여 가해자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김진관의 아버지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상담을 의뢰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곧이어 전국에서 ‘김보은, 김진관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구명활동을 시작했다. 공대위는 이 사건이 우리 사회의 부재, 법적 제도적 장치의 미비함 등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그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을 갖고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항소심을 준비하면서 공대위는 전국 56개로 확대되었고, 22명의 무료공동변호인단도 구성하였다. 공대위는 공판참관과 함께, 성폭력 피해에 관한 사회적 인식전환의 필요성과 성폭력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 사건의 의의는 그 동안 금기 시 되어온 친족 성폭력의 실상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가장 사적인 공간이고, 안식처로 여겨지던 가정 내에서 일어난 성폭행, 그래서 방치될 수밖에 없었고 또 지속될 수밖에 없는 친족 성폭력의 실태를 드러내었다.
6. 성폭력특별법 제정
성폭력 관련 상담을 하는 여성단체와 여성의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여성, 사회단체 등 12단체가 1991년 8월에 ‘성폭력특별법 제정추진 특별위원회’를 결성하여 성폭력 특별법 제정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여성계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수 차례의 논의를 거쳐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1992년 7월에 성폭력특별법 시안을 완성하여 발표했다. 여성계의 시안과 각당의 시안이 국회에 상정된 후 여성계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인권이 최대한 보호되고 성폭력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한 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다각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93년 12월에 성폭력 특별법이 통과되어 1994년 4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때 통과된 특별법은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만들어진 여성계의 주요안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제정된 지 3년 만인 1997년 7월 30일에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1998년 1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개정 과정에서도 역시 여성계에서는 개정 방안에 대한 의견을 끊임없이 제시하였고 공청회에 참가하여 여성계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성폭력특별법은 아직까지도 성폭력피해자의 권리보호에 미흡한 부분이 많으며 앞으로 지속적으로 개정작업을 펼쳐가야 할 것이다.
7.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1992년 5월 29일부터 서울대 화학과에 기기 담당 조교로 취직한 우조교는 첫 출근 이후 지속적으로 신교수로부터 업무상 불필요한 고의적 신체접촉을 당했다. 우조교는 신체접촉을 모면하게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으며, 불쾌감과 거부의 의사표시를 했다. 그러나 신교수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성희롱을 했고 93년 6월 우조교를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우조교는 이러한 부당한 조처에 대해 해결을 바라는 진정서를 대학에 보냈으나 서울대학교 당국은 진상조사는 커녕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결국 93년 8월 억울함을 알리는 대자보를 본 총학생회와 대학원 자치협의회, 여성문제 동아리협회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진상조사 결과 우조교의 피해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학교당국은 묵묵부답이었고 오히려 신교수는 93년 9월에 우조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
직장내 성희롱은 성적 친밀감 정도로 간주되어 직장내의 명랑한 분위기를 위해서 여성이 웃으면서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일반화되어 온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조교의 용기는 성희롱이 여성들에게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불쾌감과 모욕감을 주는지를 알리는 데 기여했고 우리 나라 최초의 성희롱 민사소송사건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성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판결은 국내에서 최초로 성희롱을 불법행위로 인정한 것이며, 1999년부터 남녀고용평등법과 남녀차별금지법에 의해 본격적으로 성희롱이 처벌될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여성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음흉한 눈빛, 성적 농담 등의 성희롱에 얼마나 불쾌감을 느끼며,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는지를 인식시키고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남성중심적인 성문화를 바꾸어 가는데 큰 기여를 한 사건이다.
8. 롯데호텔 성희롱 사건
2000년 6월 롯데호텔 노동조합은 여성노동자조합원 382명을 대상으로 직장내 성희롱 피해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전체의 70%가 심각하고 광범위한 성희롱을 경험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에 5개 여성단체와 민주노총, 한국노총이 노동부에 ‘호텔롯데 사업주의 직장내 성희롱 예방조치 위반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했다. 그리고 롯데호텔 여성노조원 270여 명은 신격호 사장 및 대표이사 3명, 호텔 롯데를 상대로 17억 6,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출했다.
이 사건은 직장내 성희롱으로 집단 소송을 낸 최초의 사건으로 노동부는 롯데호텔 성희롱 진정사건 조사결과 32명의 남성 임직원이 68명의 여성노동자들에게 성희롱 행위를 한 사실을 확인하고 30명은 징계조치하고 나머지 2명은 주의 조치하도록 통보했다. 또한 성희롱 예방교육을 하지 않은 롯데호텔에 과태료 300만원을 부과했다.
그러나 롯데호텔은 노동부의 행정지도를 일부 시행하지 않았다. 이에 노동부는 성희롱 가해자에 대해 부서 전환과 징계조치를 내리도록 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을 어긴 롯데에게 1인당 300만원씩 모두 3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였다. 성희롱 가해자를 징계조치하지 않은 이유로 부과된 최초의 과태료 판결이었다.
성희롱 피해자들의 최초의 집단 소송사건인 이 사건은 성희롱 피해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사측에 피해보상 및 법적 책임을 묻는 첫 번째 사례로 모든 사업주에게 남녀 차별적 직장문화 개선의 책임이 있음을 알려 내었다. 또한 성희롱을 진정한 피해 노동자가 미미한 가해자 처벌 후 결과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현실을 보여주어, 성희롱을 문제 제기한 피해 여성을 보호하는 법적 보완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왔다.
9. 강릉 K양 사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7년간 지속적으로 마을 남성 7명에게 성폭행을 당한 강릉 김양 사건이 알려지면서 장애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가 조명을 받게되었다. 이 사건에 분노한 마을 주민들은 김양의 가족들을 설득, 이 사건을 고발하게 되었다. 우선 주범인 홍씨에 대한 고발장만 접수시키면서 이후 ‘심신미약자에 대한 간음’으로 처리된 이 사건은 결국 공소권 없음으로 기각됐고, 12월 말 K양 가족이 홍씨에게 2백만원을 받고 합의함으로써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 이에 대해 마을 주민들 사이에 성폭력범들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들도 성폭행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퍼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2000년 1월 말 28개 단체로 구성된 ‘정신지체 장애여성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공대위는 2월 가해자 중 5명을 가중처벌이 가능한 성폭력특별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2명을 불구속기소하고 1명을 기소중지, 2명을 무혐의 처리하는 것으로 수사를 일단락 지었다. 그 후 가해자 처벌을 위한 서명운동과 시위 등 강력한 여론으로 주범인 홍씨는 실형 2년을 선고받고 곧바로 구속 수감되었다.
공동대책위원회는 ‘여성장애우 성폭력실태와 대책마련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하여 여성장애인 성폭력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사회적 공론화 작업에 착수했다. 여성 장애인 성폭력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관계자들은 이들을 위한 성교육 성희롱 예방교육의 필요성과 장애인 시설을 갖춘 쉼터와 전문상담기관 마련 등을 제기했다. 이후 여러 단체에서 장애인 성폭력 예방과 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여성장애인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사회적 관심에 따라 2001년에는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이 대구, 부산, 전주, 서울에 ‘여성장애인 성폭력 상담소’를 열었다.
10. 사단장 성추행 사건
2001년 1월 육군은 부하 여군장교를 성추행 한 혐의로 현역 사단장이던 김소장을 보직해임하고 육군 중앙징계위원회에 회부하였다. 김소장은 1999년 12월부터 약 6개월간 자신의 집무실 등에서 사단소속 여군장교를 껴안고 입을 맞추는 등 여러 차례 성추행하였다. 고민 끝에 피해자인 여중위가 고소장을 냈으나 하루만에 고소를 취하할 수밖에 없었다.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고 이 사실이 알려지는 과정에서,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기본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 가해자측으로부터의 회유, 협박뿐만 아니라 사생활과 관련된 근거 없는 비난을 접하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피해자가 겪은 고통과 그간의 정황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김소장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군대내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보직해임과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은 김소장은 국방부에 항고하였으나 기각되었고, 결국 지난 3월 전역지원서를 제출하였다.
여성단체들은 군대내 성폭력이 근절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국방부 차관보와의 면담을 가졌으며, 국방부는 장병교육 강화, 고충심사위원회 운영, 성폭력 상담, 신고 전담창구 개설 등을 골자로 하는 계획을 추진 중임을 밝혔다. 이 사건은 그 동안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행해져왔던 군대내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결과 군대 내에 실제로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이상의 10대 성폭력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큰 역할을 했으며 성폭력의 유형별 심각성을 알려내었다. 또한 법․제도적인 지원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Ⅳ. 남은 문제들
1. 성문화의 사회구조적 변화
성폭력을 추방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녀를 평등하게 대우하는 올바른 성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깨고 올바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도록 하는 성폭력 예방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실시해야 한다.
2. 법․제도적인 보호 장치 마련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적절히 처벌할 수 있는 보다 현실적인 법․제도의 마련과 운용이 필요하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것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일차적으로 만나는 사법관계자들의 인식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들의 인식전환을 위해서는 성폭력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요구된다.
3. 성폭력 예방과 성교육 실시
성폭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사회적인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성폭력은 순결을 잃은 수치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로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또한 여학생 대상의 순결교육 위주인 생물학적이고 남녀불평등한 성교육이 아닌 성을 긍정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유치원에서 고둥학교, 대학교까지 모든 제도교육 내에서 성교육을 필수화해야 한다.
4. 피해자에 대한 보호책
성폭력을 당하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자 쩔쩔매다가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거나 회복불능의 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피해자가 극복할 수 있도록 하고 가족들이 올바른 방법으로 대처하도록 돕는 지침이 제공되어야 한다. 또한 각 지역마다 성폭력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상담기관이나 피난처를 마련하여야 한다.
5. 가해자 재범 방지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
성폭력 가해자의 재범 방지를 위해 단순히 가해자에 대한 법적인 고소뿐만 아니라 가해자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시해야 한다.
성폭력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성폭력이라는 거대하고도 복합적인 문제는 남녀평등사회, 인간 중심적인 사회를 일구기 위한 개인적 노력, 사회적 관심, 그리고 제도적인 뒷받침이 병행될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성폭력을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여 사회 문제의 하나로 풀어가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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