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초기의 교회 저술가들은 기독교철학을 기독교신학과 동의어로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중세의 유력한 철학자들인 스콜라신학자들은 성경에서 유래된 계시신학으로부터 철학(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에 관심을 갖고 있던 자연신학을 포함하여)과 철학의 보편적인 진리들을 분리하게 되었다. 그 결과 후대에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하여 철학자가 되었다(그들 가운데는 데카르트.존 로크.고트프리드.라이프니츠.조지 버클리와 토마스 리드 등이 있다). 그들은 기독교계시의 명확한 성격보다는 오히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1931년에 프랑스의 이성론자요 철학사가인 에밀 브레이어(Emile Brehier)는 기독교철학과 같은 그러한 것은 결코 있지도 않았으며 있을 수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1. 20세기의 기독교철학에 대한 논쟁: 브레이어는 4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나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마찬가지로 초기 교회의 저술가들은 순수한 이교사상을 전용하였고 그 결과 기독교에다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는 요소들을 결합시켜 어울리지 않는 결합물을 창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근대에는 철학이 신학의 시녀로서의 비철학적 역할을 하도록 강요되었든가 아니면 완전히 자율적인 학문으로 취급되었다. 브레이어는 신학의 시녀로서의 철학의 결과는 기독교적인 것일지는 모르나 철학은 아니며, 자율적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결과는 철학일지는 모르나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몇몇 기독교 사상가들은 즉시 이에 동의했는데 그들 중에 몇몇 사람들은 벨기에의 루뱅대학교에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추종자들이었다. 이들이 기독교철학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세 가지 기본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로 만일 기독교의 특수성들이 성경의 계시를 통해 사람에게 알려진다면, 그리고 신학은 그 계시에 관한 조직적인 연구라면, 특수하게 기독교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신학에서 나타날 것이다. 둘째로 철학은 보편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진리를 찾는 인간 이성의 자율적인 행위를 요구하며, 종교적인 전제나 또는 특수계시와는 관계없이 이 목표를 논리적 수단에 의하여 추구하는 데 반하여 기독교철학은 계시된 진리에 위탁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철학에 있어서 이것은 자기 모순이다. 셋째로 철학은 성경의 계시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문제들을 다룬다. 예를 들면 감각에 관하여 또는 철학 이외의 다른 관점에서는 적절하게 진술될 수 없는 수학적 기초에 관하여 기독교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물을 수 있다. 그러한 문제들에서 볼 때 특별히 기독교철학적 입장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같은 견해는 기독교인 철학자들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많은 기독교인 철학자들이 있음이 분명한데 그들은 종종 특별히 그들의 신앙에 관계된 철학적 문제들과 철학사에 끼친 기독교의 영향에 관심을 갖는다. 프랑스의 신학자인 로저 멜(Roger Mehl)은 종교적으로 새로워진 마음
의 실재를 철학의 분야에서 증거하려는 '그리스도인의 의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교리로부터 새로운 철학적 개념들을 발전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삶의 모든 것들처럼 그의 철학도 하나님의 심판과 약속 아래 놓음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한다. 그는 시간과 영원 그리고 죄와 구원 사이의
생생한 변증법에 인격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이교사상과 관계를 끊으려는 용기를 발견한다.
또 다른 이들은 브레이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철학은 신학이든 또는 철학이든 간에 그것의 자율적인 본성을 잃지 않고서도 그리고 두 학문을 혼동하지 않고서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중세 철학사가인 에티엔느 질송(Etienne Gilson)은 중세와 그후의 시대 동안에 있어서 모두 기독교 정신은 희랍전승에 침투하여 그 전승으로부터 독특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이끌어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전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전망들, 즉 계시가 제안하였으나 그러나 이성이 순수한 철학적 방법으로
탐구하고 확립시켰던 전망들이 인간 이성에게 이같이 개방되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과 신학은 별개의 두 직위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각각 그 자신에게 고유한 문제들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에게 모두 가치있는 상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질송의 논증이 주로 역사적인데 반하여, 영국의 레오날드 호지슨(Leonard Hodgson), 프랑스의 클랑드 토레스몽탕(Clande Tresmontant), 그리고 네덜란드의 헤르만 도이베르트(Herman Dooy-eweerd) 같은 20세기의 저술가들에 의해 특이하게 추구된 두번째 시도는 성경의 계시에 내재되어 있는 세계관을 강조한다. 그들은 기독교철학은 하나님과 창조에 관한 신앙, 죄와 은총 속에 있는 인간의 상태, 그리고 그밖의 다른 독특한 기독교적인 경향들에 대한 이론상의 귀결들을 의식적으로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출발점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기독교철학은 인간정신이 자연주의철학, 허무주의철학, 기타 철학들을 대신하여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지슨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자신의 실마리로 취하는 기독교철학은 어떤 다른 알려진 철학체제보다 경험적인 증거를 더욱 적절하게 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증거와 일상적인 인간경험을 둘 다 고려하므로 계속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철학인 것이다.
셋째 논증은 기독교철학은 철학자의 삶 속에서 나타난 신앙의 영향에 의해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모리스 네동셀르(Maurice Nedoncelle)는 철학은 비인격적이고 중성적인 사업이라고 하는 브레이어의 합리주의적 주장을 비인간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으며 철학자의 인격은 불가피하게 그의 저작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특별한 이해관계와 그 자신의 삶이 그의 세계에 주는 특징은 모두 그의 사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더구나 기독교 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자연적인 정신을 풍요하게 하고 변화시킨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지만 기독교 철학자는 그가 자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가 은총의 덕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결국 기독교철학의 전통은 독특한 철학적 문제들을 자연과 은총 모두의 영향 아래서 제기하고 있는 서구사상의 체계 속으로 불가분리적으로 얽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철학은 철학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적이다.
2. 기독교철학의 의미: 기독교철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한 어떠한 이해도 아직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하고 있다. 신학적인 노선과 방법론적인 노선에 따라 다양성들이 나타난다.
(1) 신학적인 여러 입장에 근거한 견해들: 자연과 은총은 분리할 수 있지만 상호 보충적인 두 영역이라는 토마스적 교리는 기독교철학이 다른 부류의 철학들과 공통적인 주제와 방법을 공유하고 있지만, 기독교철학은 신의 은총에 대한 특수한 관계에 의해 풍부해지며 또 순화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가톨릭
의 철학자 쟈크 마리땡(Jacques Maritian)은 철학적 측면에서 자연을 설명하고 있다. 마리땡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철학의 본성은 그 목적, 즉 합리적 방법으로 얻어진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사물의 본성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에 의해 한정된다.
철학의 상태는 인간 본성의 연약함과 과제의 어려움에 의해 부과된 한계상황들을 포함하여,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들에 의해 한정된다. 어떤 사람이 희랍적 철학을 말하든 데카르트적 철학을 말하든 또는 기독교적 철학을 말하든 간에 그의 철학을 한정해 주고 있는 형용사인 희랍적.데카르트적.기독교적이라는 말들은 철학 자체의 본성보다는 오히려 철학의 역사적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리땡에 따르면, 기독교철학은 다른 역사 철학들과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특수한 상황에 의하여 그것들과 분리된다.
하나님의 은총은 객관적으로와 주관적으로 모두 철학자의 상황을 변화시킨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이성만의 힘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진리를 계시하신다. 즉 창조, 존재 자체로서의 하나님, 창조자에 의해 인정된 인간 이성, 그리고 사람의 자기이해를 위한 주요 단서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육체 안에 거하심)에 대한 광범위한 사상을 계시하신다. 주관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총은 철학적 정신에게 새로운 활력과 능력을 부여해 주시는데 그 활력과 능력은 철학적 정신으로 하여금 원칙적으로는 지성만으로도 도달할 수 있지만 유한한 인간들이 은총 이외의 수단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기독교철학의 상태를 특징짓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조력이다.
개혁주의 신학(존 칼빈으로부터 나온 개신교 전통의 신학)은 자연과 은총에 대한 토마스적 교리를 불만스럽게 생각하여 그 대신에 인간 본성의 모든 활동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죄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이와같은 견해에서 볼 때 자연적 이성과 함께 야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유한성만이 아니라 인간의 죄도 역시 유한성만큼이나 절실하게 문제된다. 철학적 이성의 자율성을 주장하며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효과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리고 이 어리석은 짓은 철학적 이해를 왜곡시킨다.
따라서 도이베르트는 주권적 하나님에 대한 복종으로 거듭난 사람에게서 나오는 기독교철학과 여타의 모든 다른 철학들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 차이점은 바로 철학의 본성에 있어서의 차이점이다. 즉 기독교철학은 도이베르트에 따르면 그것의 목적이 삶과 사고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주권적인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 대한 복종이라는 점에 있어서 독특하다. 철학적 탐구의 중립성을 주장하는 탐구자는 이와같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라는 동기를 거부하며 비기독교적 철학이 생겨나게 된 배교적 본질을 드
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도이베르트가 철학사 전반을 통해 발견한 어떤 필연적 앤티노미(이율배반)를 야기시킨다.
실존신학은 철학에 대한 견해와 신학에 대한 견해가 있어서 모두 구체적 인간 실존을 강조하는 철학인, 당시 실존주의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 견해에서 볼 때, 철학은 더 이상 사물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본성에 대한 이론적인 탐구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세계를 이해하며, 비인간화하는 세력 앞에서 존재를 위한 어떤 근거를 확인하려는 역사적 인간들의 필사적인 시도이다. 기독교 계시는 신적인 존재의 기반을 인간 존재로서의 인간 상황과 관련시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계시된 교리의 권위있는 기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존적 의미 발견에 대한 인간적인 증언이다.
존 와일드(John Wild)의 실존적 사고에 따르면 철학은 인간의 실존을 안내해 주고, 세계관을 부여해 주는 가치관과 '전체적인 의미'를 밝히기 위하여 인간 생존계의 보편적인 특질들을 탐구한다. 모든 철학자들은 완전하고 정확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길잡이가 되는 어떤 표상의 영향을 받아 그의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기독교 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표상을 가지고 그들의 세계관을 만들어낸다. 이와같은 표상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공정된 교리가 아니라 삶에 관한 태도와 가치의 다양성이다. 그러므로 와일드는 철학적 이론을 공식화하는 데 있어서 안내자로서의 기독교신학의 역할을 거부하고 그대신 인간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데에 있어서, 따라서 철학적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있어서의 기독교 신앙의 역할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기독교철학은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하여 기독교가 취하는 차이점들에 따라 정의될 것이다.
1) 철학자의 인격, 2) 철학자의 사상내용, 3) 철학적 방법론, 4) 이와같은 요소들 중에 몇몇의 결합.
첫째와 둘째번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으며, 기독교철학의 독특한 내용은 뒤에 나올 것이다. 이제 방법에 대한 어떤 설명이 남아 있다.
(2) 방법론적인 여러 입장에 근거한 견해들: 기독교철학은 갖가지 상식적 방법을 사용한다. 즉 사색적인 방법, 분석적인 방법, 또는 현상학적인 방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철학자들은 형이상학(존재의 궁극적인 본성을 탐구하는)이나 규범적 가치판단을 배제하는 또는 엄밀하게 말해서 경험적이며 따라
서 과학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만을 인정하는 환원론적인 방법을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자로 믿는 기독교신앙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평가를 내포하는 형이상학적 신앙이다. 따라서 이같은 기독교신앙과 그 결과들을 의미심장하게 토론하지 않는 어떤 철학적 방법들도 기독교에 의해 당연히 비판받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독교 철학자들은 그들 고유의 관심사들을 보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개발된 방법들을 연마하고 있는데, 그 방법들은초월적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유추의 사용 또는 역사적으로 독특한 하나님의 행위들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데 있어서 상징과 역설의 사용과 같은 것들이다.
그의 행동철학 때문에 유명해진 프랑스의 모리스 블롱델(Maurice Brondel)은 브레이어의 유서깊은 공격을 야기시켰던 것이 바로 그의 저작이기 때문에, 그리고 브레이어의 공격에 대하여 인쇄물로 대답한 최초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블롱델은 소위 내재론의 방법을 제안했었다. 그 방법은 기독
교의 계시 안에서보다는 오히려 인간 사고 안에서 출발하여 철학으로 하여금 철학 자신의 한계성들을 깨닫게 하여 은총의 필요성을 발견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신학과는 달리 초자연적인 것을 역사적 실재로 취급하지 않는다. 블롱델은 이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것을 독단적인 가설이나 인간의 이해를 위한 임의적인 부가물로 취급하거나 인간 진화의 자연적 정점으로 취급하지도 않으며, 전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상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블롱델이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내재론적 방법은 인간사고의 내부에서부터 시작하여, 초자연적 존재는 불가피하지만, 자연적인 수단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같이 인간 이성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기독교철학은 완전히 철학적이다. 그러나 그와같은 기독교철학은 여전히 인간의 초자연적인 운명을 충족시킬 만한 철학적 발전에 의하여 완성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아직도 완전히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에 도이베르트는 내재론적 방법의 객관성은 모든 인간의 행위와 사고가 '마음 가운데서' 나온다는 성경적 견해를 부인하기 때문에 블롱델을 비판한다. 그 대신에 그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이론적 사고에 대한 종교적 필수조건을 간파하기 위하여 그가 '선험적 방법'이라 부르는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그릇된' 역사철학에 대한 그의 비평은 그가 강조하고 있는 자기 모순들을 극복하고 있으며 오류의 근원이 되는 거짓된 종교적 태도를 폭로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구조적 철학은 주권적 입법자로서의 하나님과 죄와 구원에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경의 주제들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각 분야의 철학에서 이러한 출발동기들이 효과를 나타내게 하고 있다. 도이베르트는 블롱델이 한 것보다 더 철학을 신학에 밀착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철학의 독특한 방법은 물론이고 독특한 내용도 간파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철학이란 말은 특수한 위치 또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자연주의적 철학이나 이슬람철학과 같은 다른 철학 전통과 유사하지만 기독교적 배경의 영향ㅇ 의하여 그것들과 분리되는 역사적 전통을 의미한다고 결론지을 수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전통은 단일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학적 차이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차이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다원적 전통이다. 그 전통은 인간의 문제에 대해 미리 만들어 놓은 완전히 드러난 해답의 체계를 제공해 준다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신앙에 비추어서 철학적 문제를 탐구하며 철학적 탐구로 그리스도인의 심성을 풍부하게 해준다.
3. 기독교철학의 독특한 주제들: 기독교철학을 이해하는 가장 용이한 길은 철학적 영향을 입었음에 분명한 근원적 관념들을 하나씩 따로 떼어 놓고, 이 관념들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성경적 전망을 다른 고대 서구사상의 근원들로부터 분류하는 것이다.
(1) 하나님과 창조 : 우선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다른 모든 개념에 대하여 기본적인 이 단순한 확신은 고대사상에 있어서 독특한 것이었다. 히브리인들 이외의 다른 몇몇 근동의 민족들이 종교적 창조신화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바벨론 사람들은 신 말둑
(Malduk)이 괴물 티아맛을 죽이고 그 몸을 갈라 우주를 만들었다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종교적이고 교화적인 상징의 사용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신화는 무에서의(ex nihilo) 절대 창조에 관하여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하는 물질로부터의 우주 건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벨론 신화는 세계를 자유로운 행위로부터라기 보다는 오히려 투쟁 가운데서 탄생된 것이라고 간파하고 있다.
주전 4세기에 플라톤은 그의 [Timaeus](티마이우스)에서 전형적으로 희랍적인 견해를 발전시켰는데 그 견해는 영원한 '형상'들과 반항적인 '질료'를 결합하여(어떤 신화적 피조물의 두 부분들처럼) 변화하고 불완전한 현세계를 형성하였던 하위 신인 데미우르고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의 형이상학적인 여러 상태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바벨론 사람들처럼 절대적 창조를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존재하는 요소들로부터의 형성을 말하고 있다.
고대 사상은 두 개의 기본 원리를 가정하는 이원론적 경향이 있었거나 세계를 일자에서 유출된 것으로 보는 유출설적인 경향이 있었거나 또는 이 둘을 어느 정도 결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주후 3세기의 파르티아의 종교인 마니교에 따르면 물질과 영(또는 이성)이라는 이원론이 있는데 전자는 악한 존재이며 후자는 선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주는 이 두 영원한 세력들 사이의 투쟁을 위한 투기장이다. 인간이 비록 선을 악용한다고 할지라도 삶은 아직도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제시하는 히브리적-기독교적 성경과는 대조적으로 마니교의 이원론은 선과 악 사이의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긴장을 주장한다.
다른 한편 신플라톤주의의 주요한 대표자인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에 따르면 -인도의 종교, 또는 스피노자에게서, 그리고 독일 관념론에서 이와 유사한 사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특별한 사물들은 빛이 태양에서 방사되듯이 일자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에 일자의 존재라고 생각되며 독자적인 지위도 없다. 특별한 사물들은 일자와 선과 존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존재한다. 그러므로 개별적 존재는 긍정적인 사물이라기 보다는 부정적인 것이다. 그리고 특수한 사물들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선악이 공존하는 부분적 존재들의 열등한 영역이다.
그와는 반대로 히브리인들은 세계의 창조를 필연적인 유출로서 보지도 않으며 우주적 투쟁의 결과로도 보지 않았다. 그 대신에 히브리인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즉, 창조는 창조자의 지혜와 능력을 표현하는 자유롭고 인격적인 행위이다. 선이 악에 의해 악용되는 타락사상은 창조사상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창조는 계속된다. 즉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은총의 행위에서도 역시 창조적으로 행동을 계속 하신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bara(창조하다)는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행위와 그의 계속적인 창조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시간과 역사는 생명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무익한 순환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는 창조행위의 무대이며 인간편에서는 거룩한 책임을 행사하는 무대이다. 사도 요한의 로고스 개념에 의하면 삶의 모든 것들을 밝혀주시는 영원하신 창조자 하나님이 지금은 역사 속에 성육신하여 인간들 가운데서 새로운 창조를 하고 계신다.
희랍적 용어에서 볼 때 영원성은 정적인 무시간성으로서가 아니라 '영원무궁토록' 계속하는 의미있는 행위로서 이해된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의존해있지만 하나님은 독립해 있다. 즉 하나님과 만물과의 관계는 불균형적이다. 다른 어떤 존재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어떤 절대적인 이원론도 없다. 2세기의 교부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의 이원론에 반대하여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구절을 도입했음이 분명한데 그 구절은 하나님이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과 따라서 그의 피조물을 초월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그가 절대적으로 자유로이 창조하신다는 것과 그가 원하시는 것을 절대적으로 자유로이 창조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창조를 강요당하지 않으시며 존재하고 있는 질료들이나, 이용할 수 있는 형상들에 의해 한정되지도 않으신다. 그의 자유와 초월성은 신비의 영기를 산출하는데 그 신비는 과학적 분석에 의하여 사라지게 되는 자연계에 관한 신비가 아니라, 그의 존엄성과 특성이 결코 그의 활동에 의하여 완전히 계시될 수 없는, 따라서 종교적 경외와 신앙심을 자아내게 하는 한 인격과 관련되어 있는 신비인 것이다.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주장은 희랍 철학에서처럼 이론적 추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극적으로 역사적이며 인격적인 형태로 제시된다. 세계와 역사를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이지 비인격적 이성이나 임의적인 운명의 냉혹한 필연성이 아니다. 고대 사상에서 독특한 이와같은 견해는 인간과 역사, 선과 악, 그리고 자유와 도덕에 대한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태도의 원천이 되는 근본이념이다.
(2) 하나님과 인간: 기독교적 견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러므로 창조에 관하여 사실인 것은 인간에 관해서도 사실인 것이다.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되어 나오지 않았으며 신적인 것이 되지도 않는다. 또는 스토아철학이 추측하는 것처럼 인간 이성은 신의 씨앗도 아니다.
1) 인간 자아에 대한 교리 : 인간은 죽음에서의 분리를 기다리는 동안에 이생에서 서로 투쟁하는, 근본적으로 모순되는 두 부분의 합성물이 아니다. 성경적 견해는 육체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하는 육체와 영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자아의 조화를 강조한다. 육체라는 용어와 영이라는 용어는 형이상학적 명칭들이 아니라 도덕적 명칭들이다. 그 용어들은 분리할 수 있는 인간의 두 부분들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육적인 욕구에 의해 지배되든 또는 신성한 관심에 의해 인도되든 간에 한 인간이 지닌 인격의 종류를 가리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정신과 육체에 관한 17세기의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물론이고, 몸과 영혼에 관한 플라톤적 이원론도 없다.
성경에서의 영혼(히브리어 nephesh 희랍어 psuche)은 대개 '자아' 또는 '생명'과 동의어인데, 때로는 전인(whole person)을 가리키기도 한다. 영혼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선재하고 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어서, 비물질적으로 될 수 있지만, 인간의 운명은 육체로부터 분리된 불멸성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수반하는 것이다.
히브리인은 전체로부터 나온 이론적 추상으로 그의 존재의 일부분을 고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의 구체적인 자기 인식을 조사한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피조물, 즉 그 자신의 인격적 행위에서 창조자를 유한하게 반영해주는 자유로운 대리자라고 고백한다. 그는 그의 신체적인 노동에서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육체적인 기쁨에서 창조주의 형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히브리인은 이원론이나 또는 유출설이 육체를 평가한 것보다 더 고차적으로 육체를 평가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이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에서 반복된다. 즉 그는 '육신이 되셨다.' 그리고 수난 후에 그의 육체의 생은 새로워졌다. 초기의 교회는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영지주의적 가현론자들이 주장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관념을 논박하였다. 왜냐하면 가현론자들이 주장처럼 육체가 악하다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통일적인 인간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총체적 인간은 죄를 범했고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의 몸을 입고 있었지만 인간성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관념을 논박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은 신성하다. 그리고 물질적 세계에서의 인간의 행위들 중에는 신성한 어떤 것이 있다. 육체적 노동과 육체적 기쁨은 모두 생활에서 일어나는 책임들을 기억하는 자들에 의하여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선물이다. 구약성경의 시문학, 특히 잠언과 아가에서의 이러한 강조는 삶의 청지기직에 대한 신약성경적 개념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하나님의 피조계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지시하는 하나님의 법 아래 산다. 하나님의 법은 정당하거나 올바른 것을 우주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개괄된다.
2) 인간의 도덕관 : 따라서 성경적 윤리는 육체의 가치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로서의 모든 인간들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희랍적 윤리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희랍인들은 인간이성을 도덕의 열쇠로 보는 경향이 있는 반면-그래서 악은 무지로부터 발생하든가 영혼이나 사회에서의 이성적
조화의 결핍으로부터 일어난다-성경의 윤리는 이성을 비난하지도 않으며 이성에 그의 희망을 두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선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선을 행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이성의 지배는 인간의 덕이나 사회의 정의를 모두 보장해 주지 못한다. 선과 악은 마음의 도덕적 기질에 의해 산출된다.
즉, 인간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느냐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악은 무지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의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악의 치유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기질을 하나님과 그의 법에로 전환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독자적인 이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은총이 필요한 것이다.
희랍사상과의 대조는 또한 인간의 자유에 관해서도 나타난다. 희랍 전통은 근대 계몽운동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형싱학적 용어로 자유를 말한다. 즉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본래 자유하다. 왜냐하면 이성적 의지는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결정론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보다 구체적인 성경적 견해는
자유를 도덕적 입장에서 이해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종하는 가운데서 누렸던 자유를 마음으로부터 박탈당했으며 사악한 욕망의 노예상태로 되어버렸다. 5세기 초에 아우누스티누스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펠라기우스 논쟁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자유가 없으며, 이성적 의지도 하나님의 사랑보다 저급한 사랑에 의하여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유를 주장할 수없다고 주장하였다. 도덕적 자유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일어난다. 따라서 도덕적인 자유의 회복은 인간의 삶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에 의존한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도덕적 견해는 진리의 개념에까지 확장된다. 구약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emeth: 진리)는 명제의 사실성 여부에 관하여 말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부동성과 신빙성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도덕적으로 신뢰할 수 있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또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역시 믿을 수 있으며 따라서 진리이다. 그러나 명제적 진실의 개념은 도덕적 관념의 파생어로 나름대로의 위치를 지닌다. 신약성경의 용어인 aletheia는 이론적인 지식보다는 신뢰할 만한 숨김없이 털어놓은 이야기를 암시한다. 그리고 '진리'는 단순히 기독교 복음을 가리키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같은 단어사용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내재하는 관념, 즉 하나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숨겨져있다'는 관념이다. 초기 기독교의 저술가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주후 200년경에 완전한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을 간파하였다.
즉, 완전한 진리(전지하신 창조자로서의)는 하나님 한분에게만 완전히 알려졌지만 그의 피조물에게도 역시 부분적으로 알려졌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식론(지식론)에 피조물적인 겸손을 도입한다. 인간은 그의 지식을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것의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창조된 것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일반적으로 계시된 것(일반계시)이든 이스라엘과 교회의 역사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적 활동과 그 활동에 대한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기록을 통하여 특별히 그들에게 계시된 것(특별계시)이든 간에 말이다. 인간을 도덕적 피조물로 보는 성경의 견해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시도된 보다 형이상학적인 설명과는 대조적으로 역사에 대한 도덕적인 해석을 발생시켰다. 인간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는 그가 인간 역사에서 수행하시는 응보적 정의에서 나타나고 있다.
